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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윈도우 프로그램들이 단종될 때 마다, 과거 윈도우 버전의 이용자들은 프로그램 호환성의 문제를 경험해야만 했다.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제한적인 호환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능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용자들은 기존의 사용 중인 버전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고 있다. 자동차들 역시 매년 세대를 달리하는 혁신적인 신 모델이 나오기보다는 약간의 그릴 디자인이나 스타일링만을 소소하게 변경한 모델들을 지속적으로 출시함으로서 과거 구매한 모델을 도태시키려고 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장 환경에서는 점차 많은 상품들이 아무런 기능이나 품질상의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 사용되고 소모되고 있는 추세인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북미 지역에서만 매년 1억대의 휴대폰과 3억대의 컴퓨터가 별다른 고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폐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계획적 진부화'로 알려져 있는데, 기업이 비경제적인 이유로 기존의 상품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신상품을 시장에 도입하는 기업의 관행을 의미한다. 그간 계획적 진부화는 주로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패스트 패션, 도서, 휴대폰, 카메라 등 전 산업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많은 상품들은 판매 초기부터 물리적 품질이나 성능과 무관하게 조기 도태가 예정되어 있으며, 골동품처럼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상품의 가치가 증대하는 'Burgundi 효과' 는 점차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계획적 진부화에 대한 논의는 1954년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인 Brooks Stevenson에 의하며 처음으로 공론화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계획적 진부화란 무엇인가 조금 다르고, 조금 더 새롭고, 조금 더 나은 것을 조금 더 빨리 소유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종종 '내재된 진부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비경제적인 이유에서 수명이 단명할 상품을 생산함으로서 소비자들이 반복적으로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상품 전략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계획적 진부화는 기존 제품보다 디자인이나 품질이 개선된 차세대 상품이 출시됨에 따라 기존 상품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의 진부화이든 진부화라는 단어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로 소비자에게 인식되고 있으며, 장기간 그 마케팅 활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사회적 비난을 받아왔다. 일찍이 사회학자인 'Galbraith'는 매년 조금씩 자동차의 디자인을 바꾸어가며 신 모델을 출시하는 자동차 회사의 관행은 큰 사회적 낭비 요인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기업들이 과도하게 짧은 상품의 생애주기를 설정함으로서 소비자들이 별다른 선택권 없이 너무 자주 구매하도록 조장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계획적 진부화는 더욱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계획적 진부화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기업들이 더 나은 기술과 원료, 생산 시설을 가지고 더 단명하는 상품을 만들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는 것은 현대 마케팅의 최대 아이러니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부화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실제로 마케팅 환경 하에서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적 진부화 동기는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독점적 혹은 과점적 상황에 있는 기업들이 추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계획적 진부화를 활용한다. 즉 계획적 진부화를 통하여 신상품을 조기에 도입할 경우 소비자들의 재구매를 촉진함으로서 추가적인 판매와 이익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계획적 진부화를 통하여 창출되는 추가적인 이익이 신상품을 도입함으로써 발생가능한 부작용인 신구 상품 간 시장 잠식이나 연구개발비의 사용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것으로 판단하며,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완전히 새로운 독립적 신상품을 출시하기 보다는 기존의 상품들을 업그레이드함으로서 과거에 사용하던 상품들을 진부화하기를 선호한다.

둘째, 계획적 진부화는 경쟁사를 압도할 수 있는 경쟁 우위 혹은 수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기업들은 끊임없는 연구 개발과 디자인 개선을 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기존 상품의 생애주기는 점점 짧아지게 된다. ,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의 기본 속성상 경쟁의 결과로서 계획적 진부화가 증대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셋째, 기업은 신상품이 중고 시장의 중고 상품과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계획적 진부화를 활용할 수 있다. PC나 자동차와 같이 내구성이 긴 상품의 경우 대부분 중고 시장이 형성되며, 기업의 신상품 판매는 이들 중고 상품들과 직간접적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불편한 경쟁 관계를 회피하기 위하여 기업은 계획적 진부화를 시행하게 되고, 새로운 신상품의 도입을 통하여 기존에 판매한 상품과 가치 격차를 확대하며, 중고 상품을 경제적으로 진부화 시킨다. 중고 시장 자체의 존재를 제거할 수는 없지만, 신상품 시장과 중고 시장이 제공하는 상품 가치를 다르게 만듦으로서 기존 상품의 잠재적 소비자들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한다.

넷째, 빈번하게 변화하는 다양한 소비자의 니즈와 원츠를 제대로 대응하기 위하여 잦은 상품 변경은 필수적인 프로세스가 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품의 내구성을 결정짓는 요인은 기능적, 경제적 특성은 물론이고 심리적 특성도 포함한다. 즉, 기업이 진부화를 시행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구매행동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 계획적인 진부화는 다양한 부담요인으로 다가올 수 있다. 첫째, 적지 않은 경제적 대가를 제공한 후 기존의 상품을 구매하여 소유하고 있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감소시킬 수 있는 계획적 진부화 소식은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마케팅 연구에 의하면 미국 내 가정에서 내구재라 할 수 있는 TV, 냉장고, 팩스 등의 수명은 고작해야 기대 수명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가정 내 소비품들도 기대 수명의 겨우 반 정도만 사용되고 폐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소비자들은 이런 불편한 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고유한 대응 전략들을 활용하고 있다. 일예로 소비자들은 아예 동일한 상품의 재구매를 포기하거나, 경쟁 브랜드로 브랜드 전환을 함으로서 계획적 진부화가 초래하는 불편한 문제들을 차단하려고 한다.

둘째, 계획적 진부화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신상품이 시장에 등장할 기회를 박탈하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독과점 상태에 있는 특정 기업들이 완전히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는 혁신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적 진부화를 통한 지속적 판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약간씩만 개선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과거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신상품을 구매하기 위하여 경제적 지출을 감수하게 된다.

셋째, 계획적 진부화는 자원을 낭비하며,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기업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계획적 진부화는 제품의 디자인이나 스타일 변화처럼 소비자에게 큰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망을 확대함으로서 자원을 낭비하게 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획적 진부화는 불가피하게 소비자의 태도와 구매의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며, 많은 소비자들은 기업의 의도적인 진부화에 대하여 불쾌함을 느끼고 있다. 기존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은 기술적인 변화나 유행, 패션으로 등장한 신상품들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모델의 변화가 너무 잦고, 추가된 기능 역시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통상적인 계획적 진부화와 신상품 출시 전략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소비자의 이해와 입장을 기업이 보다 심각하게 배려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그간 많은 소비자들이 계획적 진부화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인식이나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이 마케팅 전략 수립에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점은 향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 청주대학교 이 원준 (meetme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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